[오형규 칼럼] 깐깐한 소비자 vs 허술한 유권자

입력 2018-03-29 17:45  

"돼지·소스·소금까지 취향 다원화
'개인의 탄생', 정치·사회변화 압박
정치판 짝퉁·진품 구분은 유권자몫"

오형규 논설위원



프랑스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246종이나 되는 치즈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는가”라고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옥스퍼드 정치인용구 사전에도 올라 있다. 국민 욕구의 다양성과 정치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비유다. 현재 프랑스에선 500종 넘는 치즈가 생산된다니 드골 시대보다 더 복잡다단해졌을 듯싶다.

이런 관점은 한국에도 대입해 볼 만하다. 지난 10년간 소비 트렌드의 변화는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다. ‘깐깐한 소비자’ 덕에 한국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의 ‘테스트 마켓’이 된 지 오래다. 커피전문점이 편의점보다 많은 ‘커피 공화국’에선 이제 커피 원산지까지 따진다. 수입맥주와 수제맥주 빅뱅, 라면 브랜드의 폭발적 증가는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푸드 트렌드’ 전문가인 문정훈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돼지고기 시장도 삼겹살 일변도에서 원산지, 품종, 숙성방식까지 따지는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숲에 방목해 도토리를 먹고 자란다는 스페인산 ‘이베리코 흑돼지’는 괄목할 만하다. 지난해 수입량이 7만2000t으로 4년 새 4배로 급증했다.

버크셔, 듀록 같은 돼지 품종을 일부러 찾아 먹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게다가 돼지고기를 소고기처럼 피가 비치는 ‘미디엄 레어’로 먹을 정도다. 냉장숙성에서 벗어나 바람숙성, 수중숙성 등도 관심사다. 마니아의 취향이 어느덧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문정훈 교수는 “일각에선 수입규제 목소리가 나오지만 스마트한 농민들은 소비자 변화를 ‘기회’로 여긴다”고 귀띔했다.

소스, 소금 등도 변화가 뚜렷하다. 대형마트의 소스 매대는 된장, 고추장 자리를 유럽 소스, 동남아 소스, 중화 소스 등이 밀어내고 있다. 왕소금, 맛소금만 알던 주부들이 프랑스 게랑드, 미국 모튼 등을 줄줄이 꿴다. 치즈는 슬라이스에서 모짜렐라, 고메치즈로 옮겨가고, 건강·다이어트와 연관된 퀴노아, 렌틸콩, 햄프씨, 아마씨 등 곡물 수요도 크게 늘었다.

‘싸고 양 많게’라는 과거 관점으론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변화다. 소비자들은 쓸 데 없는 소비는 배격하지만, 비싸도 만족하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넘어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어야 팔린다.

한국인 취향이 세분화·다원화·전문화 할수록 정치·사회의 변화 압력은 커질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를 넘어선 소비패턴은 글로벌화나 보편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주는 대로 먹어라’식 일방통행이 통할 리 없다. 이는 집단주의, 획일주의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개인의 탄생’과도 연관이 깊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용납하지 않는 ‘개인’의 존재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또렷이 확인했다.

이렇게 소비자는 변했는데 좀체 안 변하는 게 한국 정치시장이다. 양당 중심의 독과점 체제는 마치 맥주시장의 오비와 하이트처럼 경쟁적 공생관계를 형성해왔다. 지난 총선 때 다당제가 됐지만 실상은 좌우·지역 구도 속에서의 분화일 뿐이다. 수시로 포퓰리즘 경쟁이 벌어지는 걸 보면 구태 그대로다.

드골은 “정치란 정치인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는 말도 했다. 정치가 갈등 해결이 아닌, 갈등 그 자체인 한국에 딱 들어맞는다. 정치 후진성을 타파하려면 결국 정치시장 소비자(유권자)들이 깐깐해지는 길 외엔 방법이 없다.

경영전략가 마이클 포터는 《경쟁론》에서 ‘까다로운 소비자’의 존재를 해당 분야 발전의 필수조건이자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 봤다. 물건 살 때 가성비·가심비를 따지면서 정치인의 자질과 공약은 왜 따지지 않나. 지상낙원을 만들어주겠다는 허위와 짝퉁의 정치인을 솎아내는 것이나, 미래를 위해 당장 정치적 손해도 감수하고 국민에게 쓴소리도 할 줄 아는 ‘진품 정치’를 가려내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6·13 지방선거부터는 ‘충동구매’ 습관을 버리고 깐깐하게 따져보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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